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상팔국의 난 (문단 편집) == 결과 == 국제정세의 변화로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던 안라는 신라의 구원을 통해서 일정기간 세력을 유지하고, 만약 이 전쟁이 4세기 중엽의 사건이라고 했을 때, 안라국(함안) 특유의 토기인 화염문투창고배가 이 무렵부터 주변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그 세가 좀 더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성, 사천, 마산, 창원, 칠포를 비롯한 포상팔국 지역 대부분이 계속해서 안라국의 토기문화에 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고학적으로도 안라의 지속적인 우위가 확인된다. 그리고 이 전쟁은 당시 흔들리는 국제정세 속에서 영남의 진변한 각국이 얼마나 요동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남해안까지 군사력을 보낼 수 있고 변한 소국 8개 나라와 8:1로 맞짱을 뜰 정도로 신라의 국력이 신장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안라국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금관국이 방조하거나 별 힘을 못 쓴 것과 아주 대비되는 부분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고구려]] vs [[낙랑군|낙랑]]에서 [[고구려]] vs [[백제]]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물밑에서 전개되는 외교전도 치열했는데, 고구려의 파트너인 신라가 포상팔국 전쟁을 성공적으로 매조지음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정세는 일시적으로 고구려-[[신라]]의 우세로 쏠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만,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가라 7국을 평정[* 군사적으로 정벌해 완전히 수직적인 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 평정, 즉 동맹이나 형제관계를 체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성왕(백제)|성왕]]시기 때 이 시절의 국제정세를 회고하는 [[사비회의]] 기록에서도 가야와 백제가 형제의 관계였다고 말하고 있다.]하고 종국적으로는 [[평양성 전투(371년)|고구려왕마저도 참살]]하면서 백제 우위로 쏠렸다가 다시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의 등장으로 백제쪽 세력이 수세에 몰리게된다. 이때 신라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던 금관국은 신라를 아주 멸망시키기 위해 왜-가야 연합군을 편성하여 신라를 공격했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직접 구원함으로써 심대한 타격을 입고 쇠퇴해버린다. 그러면서 포상팔국 전쟁의 일원이었던 고차국이 금관국을 대신하여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아마도 고차국을 비롯한 포상팔국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그렇게 심대한 타격을 받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차국은 5세기 전반대에는 상당힌 영역권을 자랑하며 가야의 강국이 되며, 결국 안라국이 주도하던 질서를 벗어나 독자적인 질서를 세우게 된다. 금관국이 공격을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금관국이 중심이 되어 있었던 전기가야연맹이 사실상 와해되는 결과를 맞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전기가야연맹은 이후에도 버티긴 하지만 금관국의 힘은 약화가 되었고 이후 4세기 초 [[낙랑군]], [[대방군]]의 멸망 이후 그 약화는 더 가속화가 된다. 결국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면 왜, 백제와 손을 잡게 되고, 고구려에 맞서 신라를 공격하다 광개토대왕의 5만 기병 원정군에 의해 전기가야연맹은 해체하기에 이른다. 물론 해당 학설에 대해서 고고학적으로 반문이 되는 사례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